존재의 증명 대신 부정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부정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다. 내 결론은 확실한데, 앞으로도 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고 있을거다."

대신 여기에서 이 블로그 주인장 K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겠다. 한 사람보다 사람이라는 생물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조금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의 존재를 부정하면 어느정도 쉽게 확장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과연 어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눈앞에서 그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감동적인 증명이다. "내 눈앞에 가져와봐." K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은 이 글이 인격 있는 사람이 쓴건지 컴퓨터가 쓴건지 증명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박테리아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걸 눈앞에 가져오긴 힘들지만 (아니면 늘 눈앞에 있지만 보기가 힘들다) 사람은 눈앞에 데려올 수 있기 때문에 쉬운 증명 대상인듯 하다.

하지만 그게 확실한 증명은 아니다. 내 눈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눈은 들어오는 빛을 뇌에 전달하는 기관이고 영화를 보여주면 영화 속의 인물들이 움직인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영화라는 것을 아니까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안다. 하지만 캄캄한 방에 있는 물건들의 색깔을 보려고 한다면? 사람 눈의 구조상 사람은 어두운 곳에서는 흑백으로 본다! 뇌가 아주 흥미진진한 쇼를 해서 색깔이 보이는 것 같지만 그건 흑백 텔레비전의 태극기를 보고 빨강과 파랑을 상상하는 것일 뿐이다. 어두운 방안에서 색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빛의 성질을 이해하고 파장이라는 개념을 알면 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실은 눈이 섬기는 뇌가 우리 몸의 주인이라는 것(은 명확하지 않지만 이런 질문에 대한 판단은 크게 뇌가 하니까)이 중요하다. 눈앞에 사람을 보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소리도 들리고, 점심때 카레를 먹었다는 냄새도 맡을 수 있으면, 감각은 더 확실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크게 보면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누군가가 내 눈을 속일 수 있다면 코도 속일 수 있다. 조금 더 나은 방법은, 말을 시켜봐서 대답을 들으면 이 눈앞에 있는 무엇인가가 사람인지 아니면 사람 비슷한건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스타워즈를 보면 홀로그램으로 전화 비슷하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상대방의 영상이 3차원으로 눈앞에 그려진다. 영화에서는 지지직 하면서 화면이 조금 일그러지기도 하는데 그건 20세기의 시청자들을 위해 그게 가짜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 뿐 22세기에 쓰는 것은 화질이 좋아서 육안으로는 정말 사람인지 구별할수가 없다. 그래도 만져볼수도 있다면? 이미 3D 가상현실 게임을 해본 사람은 장갑을 끼면 어떤 영상을 만졌을 때 장갑의 반작용을 통해 정말 물건을 만진 느낌을 얻을 수 있다. 홀로그램이 발달하면, 영상이 아니라 만져지는것도 뿌려서 사람을 만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좋은 주장은 아닐 지도 모른다. 간단한 사실을 이상하게 설명하기 위해 실현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미래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므로. 그런 기술이 없다면 게임은 끝이다.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그냥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게 제일 합당한 설명이다. 하지만 오컴의 면도날은 다른 근거가 없을 때 이론의 경제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문명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면 어떤 게 더 경제적인 설명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어떤 단계까지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가.
이게 K가 존재한다는 말에 타격을 줄 수 있을까. 어찌되었던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더 어려운 건 영화 매트릭스의 주제. 우리가 매트릭스라는 기계가 주는 착각 속에서, 즉 꿈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저쪽 세계에 다른 의식이 있어서 거기에 진짜 우리 몸이 있지만, 조금 더 확장하면 그런 몸 없이 그냥 우리가 이 세계에서 활동하는 게 컴퓨터 프로그램 속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뇌에 장난을 쳐서 기억이나 사물을 만든다면 그게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런너에 보면 인간과 같은 모양의 로봇들(레플리컨트)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인간과 똑같고 구별이 거의 안된다(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 하여간, 그 존재들의 기억이란 정말 어린 시절에 그런 일을 당했던 기억이 아니라 로봇을 제작했던 회사에서 넣어준 것이다. 만일 사람이 물질로만 이루어지고 과학 법칙에 따라서만 행동한다고 하자. 우리 몸의 크기가 유한하고, 분자의 갯수가 많지만 역시 유한하므로 회사의 기계가 좋다면 정말로 내 머릿속에 그런 기억을 넣을 수 있다.

내 존재에 대해 이야기를 국한하는 것이므로 다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관계 있는 이야기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날아다니는 스파게티나 소행성과 함께 타양계를 돌고 있는 커피잔에 대해서도 공평한 이야기를 해야 할까. 플라톤은 아무런 근거 없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아니면 저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그 하찮은 커피잔도 그걸 발견해냄으로써 사람들 머리에 자리잡게 되었고 그게 존재를 증명하는 것일 수 있다. 그걸 처음 말한 사람이 탄생시킨 것. 근데 모든 게 생각만 하면 존재한다는 것도 그렇다. 진짜 눈으로 보는 것은 그것보다 많은 면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신이 더 나은 존재라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단맛의 존재는 그 커피잔보다 더 합당한 존재일까.

도서정가제 개정안도 문제지만

1.

어떤분이 알려주셔서 알았다. 예스24에서 적립금등에 규제를 주는 도서정가제 개정에 대한 반대 서명(링크)을 받고 있었다.

댓글을 보니 대형서점의 로비라는 말이 많이 들어왔다.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고민이 생겼다. 동네 책방이 죽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지금 동네 책방이 죽어가고 있다는 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오마이뉴스 기사(링크)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 글에도 그동네 동네책방이 다섯 개쯤 있었는데 자기네만 빼고 다 망했단다. 그리고 그 서점 주인은 남편이 벌이를 하기 때문에 버티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게 현실이다. 물론 대형서점과 경쟁하기 위해 고민도 하고 그런 요소를 갖추어 놓기도 한다.

대기업에서 서민들과 소매상의 피를 빨아먹는 초대형 수퍼마켓(SSM)이 등장했지만 이보다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게 책방이다. 일단 수퍼마켓은 물건이 신선해야 하고 소비자가 바로 쓰기 원하니 인터넷에서 야채나 마요네즈를 사먹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동네 책방 - 초대형 서점 - 인터넷 서점의 사슬이라고나 할까. 꼭 설명하지 않아도 초대형 서점도 마찬가지로 동네로 들어오고 있다. 대형 서점의 홈페이지 가서 지점을 살펴보면 놀랄 것이다. 거기에도 xx문고가 있었어?

외국의 경우 도서정가제를 철저하게 지키는 나라들(주로 북유럽)에서는 작은 서점들이 잘 살아나가고 있지만 인터넷서점 아마존과 반스앤노블스가 있는 미국은 지난해말 서점이 한 군데도 없는 도시가 탄생할 정도로 책방이 죽었다. 인구 23만인 텍사스주 라레도에 마지막 서점이 문을 닫았다(링크). 우리나라에서도 책방에서 책을 들추어본 후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2.

인터넷 서점이 책값 할인을 해주어 우리는 정말 책을 싸게 샀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답은 그렇지 않다. 안타깝게도 나는 인터넷 서점 때문에 책값이 올랐다고 생각한다. 도서정가제가 생기기 전에는 인터넷 서점 마음대로 책값을 할인해서 팔았고 사람들이 좋아했다. 근데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할인을 받아서 책을 사게 되면 책값이 실질적으로 내려가는 걸 의미한다. 출판사는 바보가 아니다. 출판사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책값을 올리게 된다. 정확한 자료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인터넷 서점의 등장-호황 시기와 책값의 상관관계를 조사하면 좋은 논문이 될 것이다.

이는 악순환을 의미한다. 동네 책방에서는 거품을 담은 책값으로 판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에 생각보다 많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이동통신사나 신용카드사 할인카드를 안 가지고 가서 밥을 먹으면 진짜로 손해볼 뿐이고, 할인 혜택을 받는 사람은 사실상 제값을 다 주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제는 패밀리 레스토랑은 이제 장사가 안된다고 한다. 아웃백, 베니건스가 모두 팔린다. (신문기사 1,2. 물론 이들의 부진의 원인이 이거 하나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그냥 싫증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음식의 품질이 예전만 못한것도 사실이다.) 영화표값도 마찬가지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평형 이론이라고 한다.

3.

도서정가제가 생기면서 인터넷 서점의 할인액을 제한하고 특히 신간에 대한 할인폭을 10%이내로 제한했다. 여기에 대응해서 인터넷 서점에서 들고 나온 것은 크게 두가지. 신간에 대한 할인폭이 책값에 대한 할인이므로, 마일리지 적립폭을 늘이고, 신간이 포함되면 한권이라도 무료배송을 한다는 것이다. 후자를 통해 책이 얼마나 마진이 남는 장사인지를 알 수 있다 ^_^. 전자는 결국 할인율 낮은 사실상의 할인이 된 것이고 이번 개정안의 칼질 대상이 되었다. 이번 개정안에 의하면 신간에 대한 할인에 마일리지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일단 인터넷 서점의 피해자인 오프라인 서점의 형평성을 위해 도서정가제를 더 엄격하게 시행하되, 소형 서점이 망하지 않도록 대형 서점에 할인 폭을 차등 적용할 수 있겠다. 대형 서점도 소형 서점을 죽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실질적인 약자는 대형 서점보다는 인터넷 서점이다. 도서 정가제 개정안에 반대하는 인터넷 서점들의 주장은 "제발 싸게 책을 팔게 해주세요" 아닌가. 따라서 책값이 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도서 시장 구조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니라 소비자라고 생각한다. 소매점에서 책 한권 사기 아니면 마음에 드는 작은 서점을 추천해 줄 수도 있겠다. 물론 장사 안된다고 짜증내는 동네 서점도 많고, 그래서 안 가는 경우도 많아 뭐라고 할 수도 없다.

4.

추가. 어떤 블로거님이 좋은 문제 제기를 하셨는데. 첫째 10%마일리지 때문에 인터넷 서점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 오프라인 서점은 이제 메리트가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에 대해 답글을 남겼는데 살을 좀 더 붙이면 다음과 같다.

오프라인 서점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책을 읽어보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알라딘 등에서는 미리보기를 하지만 앞부분만 보여주니까 여행 책자같은 건 본문을 볼 수가 없다. 숙소 안내나 위치 표시, 장소 설명들은 못 보고, 여행 준비에 대한 것만 보고 책을 골라야 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건, 무슨 책을 살 지 알때는 인터넷 서점이 싸고 좋지만, 무언가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이 있는지 모를 때 오프라인 서점이 유용하다.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는 코너에 가면 된다. 물론 인터넷 서점도 보완책으로 주제별 분류가 있고 독자 서평이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를 대체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모 인터넷서점에서 주문하면 파손된 책 (표지가 마구 구겨지거나 제본기에 고정하기 위해 기계에 물린 자국) 들이 종종 온 적이 있다. 꽤 많다. 아주 미묘한 파손이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반품도 못하고 한다. 하기사 이런 것까지 따지는 애서가는 어쩔수 없이 오프라인을 이미 이용하고 있을 것이니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 그 자리에서 책을 들고 갈 수 있다는 것. 요새는 인터넷으로 당일 배송해도 당장 만져보고 싶어 디카를 사러 상가에 가본 경험이 있는 분도 계실 것이다.

또 추가. 소매점을 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표현보다는 도서 유통과 판매를 독점하는 곳이 되도록 생기지 말아야 한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커질수록 값을 가지고 장난치기가 여러모로 쉽기 때문이다.  대형 서점/마트에서 하는 일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출판사/소비자에게 무리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다.

숭례문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 글의 제목은 낚시성이 짙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과 관계가 있으니 먼저 제 말 좀 들어 보소.

1.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불만을 표출하는 사건들이 많다. 전에는 야구르트나 과자에 독극물을 넣는 사건들이 있었고,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사치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무조건 납치하고 죽이는 사건들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들, 벌받아 마땅하다는 건 너무 당연하지만 이야기를 안하고 넘어가는 게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근래 많아진, 아니 근래도 아니고 많은 해 전부터 자살한 사람들 생각을 해보자. 누구는 OECD국가중 자살률이 1위라고도 하고, 세계적으로 자살율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막다른 골목까지 간 사람들. 자살을 하는 사람의 동기는 무엇인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무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는 의미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말하고 싶은 최후의 표현이다.

물론 나약해서 죽는 사람도, 고인에게는 누가 되겠지만, 없다고 안하겠다. 하지만 정말 어디가서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이 죽는 심정.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제는 하도 많이 죽어서 신문 구석에도 기사가 나지 않는 자살. 그래서 사람 목숨도 이제 별 가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이들 중에 단 한 명의 목숨이 숭례문보다 가벼운건가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사건의 본질과는 관계 없지만, 따라서 이자리에서 잠재적으로 숭례문을 불지르는 것보다 자신의 목숨을 끊은 것을 택한 분들께 조의를 표해야 한다)

2.

어제 방화범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범행 동기가 법원의 판결에 대한 불만이라고 한다. 이 사람도 사회에 대한 막연한 억울함을 가지고 있고 이걸 극단적으로 표출한 사람이다. 일단, 이 사람은 죄질이 나쁘다고 본다. 불만을 품게 된 사건이 과연 인생 막장까지 갈만한 중요한 것인가 의문이 들고, 비슷한 범행을 하다가 잡혔던 상습범이다. 그나마 참작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칠까봐 기차 전복이나 종묘같은 인구밀도가 높은 곳은 불지르지 않았다는 것이기는 하다.

누구탓인가


네이버에 올라온 기사
인용

"안상수 원내대표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숭례문을 바라볼 때 국민의 허탈감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노무현 정권이 그야말로안전업무에 대해 얼마나 허술했는지, 신경쓸 데는 쓰지않고 엉뚱한 곳에 신경쓴 데에 따른 비극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비판의 화살을노무현 정권으로 돌렸다."

1